
6월 말에 유럽 여행 경비를 계산해 본 적이 있다면, 그 엑셀 파일을 한 번 다시 열어보시길 권합니다. 숫자를 하나도 안 바꿔도 총액이 30만 원 가까이 줄어 있을 겁니다. 항공권도 그대로, 호텔도 그대로, 쓰기로 한 돈도 그대로인데 말이죠.
바뀐 건 딱 하나입니다. 환율.
6월 말 1,549.4원이던 원·달러 환율은 7월 말 1,424.0원으로 내려앉았고, 8월 28일 서울 외환시장에서는 1,372.5원에 마감했습니다. 약 13개월 만의 최저치입니다. 두 달 사이에 177원, 비율로는 11%가 넘게 빠졌습니다. 8월 19일에 1,300원대로 내려선 것만 해도 11개월 만이었죠. 불과 몇 달 전 "1,500원이 뉴노멀"이라는 말이 돌던 걸 생각하면, 시장의 방향 자체가 뒤집힌 셈입니다.
문제는 이 변화가 여행 계획에 정확히 얼마만큼 반영되는지 감이 잘 안 잡힌다는 점입니다. 환율이 11% 내렸다고 해서 여행 경비가 11% 줄지는 않습니다. 어떤 항목은 그대로 따라 내려가고, 어떤 항목은 꿈쩍도 안 하며, 심지어 반대로 오른 항목도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차이를 숫자로 뜯어보겠습니다.
현지에서 쓰는 돈부터 계산해 봅니다
가장 단순한 계산부터 해보죠. 환율이 곧바로 그리고 100% 반영되는 항목은 '현지에서 쓰는 돈'입니다. 식비, 교통비, 입장료, 쇼핑. 이 부분은 계산기만 두드리면 답이 나옵니다.
유럽 7박 여행을 잡고 현지 지출을 2,000유로로 잡았다고 해봅시다. 6월 26일 기준 유로/원 환율은 1유로당 약 1,754원이었습니다. 350만 8,800원. 8월 28일 기준으로는 1,613원 언저리니까 322만 5,800원. 차액이 28만 3,000원입니다. 왕복 공항철도값에 파리에서 사흘 저녁 먹을 돈이 그냥 생긴 겁니다.
미국은 폭이 더 큽니다. 열흘 일정에 현지 지출 3,000달러를 잡았다면 6월 말 환산액은 461만 5,000원, 8월 말은 411만 원. 차이가 50만 원을 넘습니다. 네 식구가 6,000달러를 쓰는 여행이라면 100만 원이 왔다 갔다 합니다.
태국은 어떨까요. 5박 일정에 4만 바트를 쓴다고 치면, 6월 말 바트당 46.0원 기준으로 184만 1,600원이던 것이 8월 말 41.7원 기준으로 166만 8,000원이 됩니다. 17만 원 조금 넘게 줄었습니다.
외우기 편한 어림셈 하나 드리자면, 환율이 1% 내리면 현지 지출 100만 원당 1만 원이 줄어듭니다. 지금은 통화별로 8~11% 내린 상태니까, 현지에서 200만 원어치를 쓸 계획이라면 16만~22만 원 정도가 굳는 구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래 환율은 모두 매매기준율이고, 실제 환전에는 스프레드가 붙습니다. 은행·카드사별 실거래 수치는 각자 확인이 필요합니다.)
통화마다 내린 폭이 다릅니다 — 이게 목적지 선택을 바꿉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이 놓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환율이 내렸다"는 말은 보통 달러 이야기인데, 여행지 통화는 저마다 다른 폭으로 움직였습니다.
6월 26일과 8월 28일을 비교해 보면 이렇습니다. 달러는 약 1,538원에서 1,370원으로 11.0% 내렸습니다. 가장 많이 빠졌죠. 파운드는 2,041원에서 1,852원으로 9.3%, 100엔은 950원에서 861원으로 9.4%, 태국 바트는 46.0원에서 41.7원으로 9.4% 내렸습니다. 그런데 유로는 1,754원에서 1,613원으로 8.1% 하락에 그쳤습니다.
8월 28일 기준 다른 통화도 적어두면, 싱가포르 달러 약 1,087원, 호주 달러 약 990원, 위안화 약 204.5원, 필리핀 페소 약 22.1원, 스위스 프랑 약 1,695원, 인도네시아 루피아는 1,000루피아당 약 77.6원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번 환율 하락의 수혜는 미국·미주 노선에 가장 크게 떨어졌다는 겁니다. 그동안 "환율 때문에 미국은 도저히 못 가겠다"며 미뤄뒀던 여행이 있다면, 적어도 지출 항목에서는 지금이 지난 1년 중 가장 나은 조건입니다. 반대로 유럽은 상대적으로 덜 내렸으니, 유로존 여행을 두고 "환율 좋아졌다니 지금 가자"고 판단하기 전에 실제 유로 환율을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게 좋습니다. 달러 기준 뉴스를 보고 유로 여행 예산을 짜면 계산이 어긋납니다.
그런데 항공권은 왜 그대로일까요
여기서부터가 실망스러운 대목입니다. 현지 지출은 환율을 그대로 따라오는데, 항공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유는 여러 겹입니다. 우선 국내에서 파는 한국 출발 항공권은 애초에 원화로 고시됩니다. 항공사가 환율 변동을 운임에 반영하는 데는 시차가 있고, 그 반영도 하락기엔 굼뜬 편입니다. 좌석 공급과 수요가 운임을 결정하는 비중이 환율보다 훨씬 크기도 하고요.
게다가 지금은 유가가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 사태 이후 국제 유가는 여전히 높은 수준입니다. 브렌트유는 7월 23일 배럴당 105달러까지 올랐고 최근에도 90달러 근처를 오갑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은 중동 산유국의 생산이 2027년 초까지는 사태 이전 수준으로 돌아오기 어렵다고 보고, 2026년 브렌트유 평균을 배럴당 87달러로 잡고 있습니다. 그 여파로 9월 한국 출발 국제선의 항공 부대비용도 8월보다 크게 올랐습니다. 대한항공 기준 미주 왕복은 8월보다 19만 원가량 더 붙는 것으로 안내되고 있습니다.
즉, 환율에서 아낀 돈의 일부는 항공권 쪽에서 다시 새어 나갑니다. 미국 왕복을 예로 들면 현지 지출에서 50만 원을 아꼈는데 왕복 항공 비용이 19만 원 늘었으니, 순이익은 30만 원 남짓으로 줄어드는 셈이죠. 그래도 남는 장사이긴 합니다만, "환율 내렸으니 여행비가 11% 싸졌다"고 계산하면 실제와 어긋납니다.
실전 요령으로는, 항공권 결제와 현지 예산을 분리해서 생각하시길 권합니다. 항공권은 유가와 좌석 공급을 보고 타이밍을 잡고, 현지 지출은 환율을 보고 미리 확보하는 겁니다. 하나로 묶어서 "지금이 좋은 시기냐"를 물으면 답이 안 나옵니다.
추석은 나흘입니다. 그리고 9월 23일과 28일
가을 일정을 짜신다면 날짜부터 정확히 알고 계셔야 합니다. 2026년 추석은 9월 25일 금요일이고, 법정 연휴는 9월 24일 목요일부터 26일 토요일까지 사흘입니다. 26일이 토요일이라 대체공휴일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다만 일요일인 27일이 붙으니 실제로는 목·금·토·일 나흘을 쉬게 됩니다.
여기에 하루를 더 붙이면 닷새가 됩니다. 앞쪽 9월 23일 수요일에 연차를 쓰면 23~27일, 뒤쪽 9월 28일 월요일에 쓰면 24~28일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가 항공권 값에 꽤 영향을 줍니다. 통상 연휴 시작일과 끝나는 날 직후의 귀국편이 가장 비싸므로, 남들과 반대로 움직이는 쪽이 유리합니다. 대다수가 24일 출발·27일 귀국을 노린다면, 23일 출발·28일 귀국은 같은 노선에서도 다른 가격표가 붙는 경우가 많습니다.
명절 항공권 자체는 원래 비싼 구간입니다. 환율이 아무리 좋아졌어도 이 시기 운임은 부르는 게 값에 가깝습니다. 이미 8월 말이니 지금 추석 항공권을 새로 잡는 건 늦은 편이고, 정 가야 한다면 인기 노선보다 좌석이 남아 있는 노선을 뒤지는 편이 현실적입니다.
환율 이익을 진짜로 챙기려면 결제 방식부터
환율이 좋아져도 결제 단계에서 흘리면 소용이 없습니다. 세 가지만 짚겠습니다.
첫 번째, 해외 원화결제(DCC)는 반드시 막아두세요. 현지 상점에서 "원화로 결제해 드릴까요?"라고 물으면 대개 3~15%에 이르는 수수료가 붙습니다. 환율이 11% 내려서 아낀 돈을 한 번의 결제로 날릴 수 있는 규모입니다. 카드사 앱이나 홈페이지에서 사전 차단 서비스를 신청해 두면 애초에 승인이 거절되니 실수할 일이 없습니다. 출국 전에 5분이면 끝납니다.
두 번째, 여행 특화 카드의 무료 통화 범위를 확인하세요. 카드마다 다릅니다. 트래블월렛은 달러·유로·엔 3개 통화에 환전 수수료가 없고 나머지 통화는 0.5~2.5%가 붙습니다. 하나 트래블로그는 41개 이상 통화에 대해 살 때 수수료를 상시 면제하고 지원 국가는 58개국입니다. 동남아나 중앙아시아처럼 마이너 통화권으로 간다면 이 차이가 실제 비용을 가릅니다. 조건은 수시로 바뀌니 출발 직전 각 사 공지를 다시 확인하시는 게 안전합니다.
세 번째, 신용카드 해외결제는 환율이 나중에 적용됩니다. 현지 통화가 국제 카드사에서 달러로, 다시 국내 카드사에서 원화로 바뀌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쓰이는 환율은 결제한 날이 아니라 매입이 이뤄지는 며칠 뒤 환율입니다. 환율이 내려가는 국면에서는 이게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튀어 오르면 청구서를 보고 놀라게 됩니다. 지금처럼 방향이 확실치 않은 시기에는 미리 충전해 두는 선불형 카드 쪽이 계산이 깔끔합니다.
5월과 6월에 사람들이 여행을 접었던 이유
환율이 여행 수요에 실제로 영향을 준다는 건 통계로도 확인됩니다.
올해 1~6월 국민 해외관광객은 1,496만 1,910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2.7% 늘었습니다. 그런데 월별로 뜯어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1월은 9.9% 증가, 2~4월도 각각 5.5%, 4.4%, 6.3% 증가로 좋았는데, 5월에 2.1% 감소로 꺾이더니 6월에는 10%나 줄었습니다. 환율이 1,500원대로 치솟던 바로 그 시기입니다.
여행사 실적도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하나투어는 2분기 영업이익이 54억 원으로 43% 줄었고 매출도 1,154억 원으로 3.8% 감소했습니다. 모두투어는 매출이 422억 원으로 6% 늘었는데도 8억 원 영업손실을 내며 적자로 돌아섰습니다. 고환율과 중동 정세, 유가가 겹친 결과였습니다.
반대로 지금은 분위기가 돌아서고 있습니다. 증권가에서는 추석 효과와 환율 개선이 8월부터 나타나고 있어 3분기부터 실적이 나아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행업계도 그동안 아웃바운드에 쏠려 있던 영업을 인바운드 쪽으로 넓히는 중입니다. 참고로 인천공항은 올해 상반기 국제선 여객 3,839만 명을 기록해 런던 히드로(3,779만 명), 싱가포르 창이(3,453만 명)를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습니다. 개항 이후 처음입니다.
여행자 입장에서 이게 무슨 뜻이냐면, 지금은 아직 남들이 덜 움직인 구간이라는 겁니다. 환율은 이미 내렸는데 예약은 아직 몰리기 전. 이 시차가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환전해야 하나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확답은 못 드립니다. 다만 시장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정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증권가는 하반기 환율 하단 전망을 1,340~1,360원 수준까지 낮춰 잡고 있습니다. 미국 기준금리가 하반기에 2%대 후반까지 내려간다면 1,300원대 중후반까지 갈 여지가 있다는 시각도 있고요. 반면 블룸버그 컨센서스, 그러니까 국내외 28개 금융사 전망의 중앙값은 2026년 12월 환율을 1,400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다시 오를 수 있다는 이야기죠. 관세 불확실성이 풀리고 달러 인덱스가 더 빠지면 내년에 1,200원대까지 본다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이건 꽤 낙관적인 축에 속합니다.
전망이 이렇게 갈린다는 건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흥미로운 건 기업들의 행동인데, 환율이 급락하던 7월에 기업 달러예금은 오히려 101억 1,000만 달러 늘어 역대 최대 증가폭을 기록했고, 거주자 외화예금 잔액은 1,283억 4,000만 달러로 사상 최대까지 올라갔습니다. 싸졌을 때 사둔 겁니다.
여행자가 따라 할 만한 건 이 정도입니다. 연내 확정된 일정이 있다면 필요한 금액의 절반쯤을 지금 확보하고, 나머지는 나눠서 채우는 것. 한 번에 다 바꾸면 어느 방향으로 틀려도 뼈아프지만, 나눠 사면 평균 근처에 안착합니다. 요즘 여행 특화 카드는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금액만 충전해 두는 게 가능하니 실행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10월이라는 창
날짜 하나만 더 짚고 마치겠습니다.
10월은 유럽행 항공권 기준으로 여름 성수기가 끝나고 연말 성수기가 시작되기 전, 가격이 내려앉는 구간입니다. 항공권 검색 서비스들의 집계를 보면 한국 출발 유럽 노선은 12월이 평균 57만 원대로 가장 싸고, 3~4월이 90만 원대로 가장 비쌉니다. 최근 인천-프랑크푸르트 왕복 최저가는 88만 원대에서 잡히는 것으로 조회됩니다. 같은 유럽 여행이라도 8월에 가는 것과 10월에 가는 것은 항공권만 두 배 가까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수치는 조회 시점과 노선에 따라 크게 달라지니, 실제 가격은 직접 확인하셔야 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지금은 현지 물가는 8~11% 저렴해졌고, 항공권은 유가 때문에 아직 안 내렸으며, 10월은 원래 항공권이 싸지는 시기이고, 남들의 예약은 아직 본격적으로 몰리지 않았습니다. 이 네 가지가 겹치는 구간이 그리 자주 오지는 않습니다.
물론 환율은 언제든 다시 튈 수 있습니다. 두 달 만에 177원이 빠졌다는 건, 두 달 만에 그만큼 오를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지금 당장 예약하세요"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6월에 접어뒀던 그 계획, 그때 "환율 때문에 무리"라고 판단해서 접었던 그 여행지가 있다면. 계산기를 한 번 더 두드려 보시길 권합니다. 같은 여행인데 답이 달라져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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