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가 무너지는 속도, 영국이 보여주는 극단적 사례
2026년 7월 20일, 영국에 새로운 총리가 취임했다. 이름은 앤디 버넘(Andy Burnham). 그런데 이 소식이 유독 눈길을 끄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가 최근 10년 사이 영국의 '일곱 번째' 총리라는 점이다. 한 나라의 정부 수반이 이렇게 자주 바뀌는 것은 정치가 안정된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키어 스타머(Keir Starmer) 전 총리는 2024년 총선에서 노동당을 압도적 승리로 이끌며 14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뤄낸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채 2년도 되지 않아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은, 지금 영국 정치가 얼마나 근본적인 위기를 겪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글에서는 스타머가 왜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배경에 있는 이민 문제와 극우 정당의 부상은 무엇인지, 그리고 새 총리 버넘이 어떤 인물이고 앞으로 영국 정치가 어디로 향할지를 차근차근 짚어본다.
스타머의 몰락 - 압승에서 조기 사퇴까지
스타머는 2024년 총선에서 보수당 14년 집권을 끝내고 노동당을 재집권시킨 인물이다. 취임 초기만 해도 그는 안정적인 리더십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상황은 빠르게 악화됐다. 2025년과 2026년 지방선거에서 노동당은 연이어 참패했고, 특히 2026년 5월 지방선거에서는 1,000석이 넘는 지방의회 의석을 잃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아들였다.
당 내부의 불만도 임계점에 달했다. 2026년 5월 기준으로 95명이 넘는 노동당 의원들이 스타머의 사퇴 또는 사퇴 일정 제시를 공개적으로 요구했고, 웨스 스트리팅(Wes Streeting) 보건장관을 비롯한 각료와 차관급 인사 여러 명이 항의성 사임을 했다. 결국 스타머는 6월 22일 노동당 대표직에서 물러났고, 뒤이어 총리직도 내려놓았다. 그는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내 할 일은 끝났다"는 말을 남기고 버킹엄궁으로 향해 국왕에게 공식적으로 사임을 보고했다.
여기서 잠깐 짚어야 할 대목이 있다. 영국은 한국과 달리 국민이 총리를 직접 뽑지 않는다. 총선에서 다수당이 된 정당의 대표가 자동으로 총리가 되는 의원내각제 국가다. 따라서 집권당 대표가 임기 중 교체되면, 국민투표 없이도 새 대표가 곧바로 총리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노동당 대표 경선을 거쳐 버넘이 선출되자, 별도의 총선 없이 그대로 총리직을 승계한 것이다.
스타머 정부를 무너뜨린 두 개의 전선 - 이민과 복지
스타머 정부가 무너진 배경은 단순하지 않다. 좌우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았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우파 성향 유권자와 평론가들은 정부의 이민 정책과 세금 인상을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이민자 유입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는 상황에서 스타머 정부가 강경한 이민 억제 수사(레토릭)를 시도했지만, 정작 정책 효과는 미미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이 틈을 극우 성향의 리폼 UK(Reform UK)가 파고들었고, 잉글랜드 북부의 전통적 노동당 지지층 사이에서도 리폼 UK 지지가 빠르게 확산됐다.
반면 좌파 진영에서는 정부의 가자지구 전쟁 대응, 복지 개혁, 부유세 도입 거부 등을 문제 삼았다. 즉 스타머 정부는 이민 문제로는 우파에게, 복지·재정 문제로는 좌파에게 동시에 신뢰를 잃은 셈이다. 이런 '양쪽에서 두들겨 맞는' 구도는 중도 성향 실용주의 노선을 표방했던 스타머식 리더십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확한 지지율 하락 폭이나 개별 정책의 인과관계는 매체마다 강조점이 달라 정확한 최신 상황은 확인이 필요하다.
리폼 UK와 나이절 파라지의 부상
이번 사태의 또 다른 축은 나이절 파라지(Nigel Farage)가 이끄는 리폼 UK의 급부상이다. 브렉시트를 이끈 인물로 잘 알려진 파라지는 이번에는 반이민, 포퓰리즘 노선을 앞세워 전통적인 보수당·노동당 양당 구도를 뒤흔들고 있다. 2026년 여론조사에서는 리폼 UK가 24%의 지지율로 보수당(19%)과 노동당(19%)을 모두 앞서는 결과까지 나왔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군소정당 취급을 받던 리폼 UK가 이제는 영국 정치의 '제1야당'급 세력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는 유럽 전역에서 나타나는 극우·포퓰리즘 정당 강세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다만 영국은 소선거구제(승자독식) 특성상 정당 지지율이 그대로 의석수로 반영되지 않는 구조여서, 리폼 UK가 실제 총선에서 얼마나 많은 의석을 가져갈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럼에도 파라지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노동당 내 위기감을 증폭시킨 핵심 요인이었다.
새 총리 앤디 버넘은 누구인가
버넘은 정치권에서 낯선 인물이 아니다. 16년간 하원의원을 지냈고,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 정부에서 여러 각료직을 역임했다. 두 차례 노동당 대표 경선에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이후 국회를 떠나 그레이터맨체스터 시장으로 자리를 옮겨 '북부의 왕(King of the North)'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지역 기반 리더십을 다져왔다. 최근 보궐선거를 통해 다시 하원에 복귀했고, 그 직후 곧바로 당권과 총리직을 거머쥐는 이례적인 정치 행보를 보였다.
여론조사에서 버넘은 파라지(16%)나 케미 배드나크 보수당 대표(13%)보다 높은 30%의 선호도를 기록하며, 노동당이 리폼 UK의 상승세를 막을 수 있는 '최선의 카드'로 평가받고 있다. 정책 성향으로는 전통적인 노동당 좌파에 가까운 인물로 분류되며, 지방정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용적 행정 능력이 강점으로 꼽힌다.
버넘 정부의 과제와 향후 전망
취임 일성으로 버넘은 "지난 40년간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오는, 영국의 서킷 브레이커가 되겠다"며 새로운 정치 모델과 경제 모델을 예고했다. 구체적으로는 노숙자 문제 해결을 첫 지시 사항으로 내걸었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20년 가까이 이어진 저성장 흐름을 끊기 위해 공공·민간 자본을 교통, 주택, 인프라에 집중 투입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그러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다. 파라지는 즉각 "국민의 위임(mandate) 없이 정치 개혁을 밀어붙일 수 없다"며 조기 총선을 요구하고 나섰다. 실제로 차기 총선은 법적으로 몇 년의 여유가 있지만, 정당성 논란이 계속되면 버넘 정부도 조기 총선 압박에서 자유롭기 어려울 수 있다. 또한 그가 예고한 '40년 만의 최대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 패키지로 이어질지,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지는 아직 베일에 싸여 있어 정확한 정책 로드맵은 향후 발표를 지켜봐야 한다.
영국의 이번 총리 교체는 단순한 리더십 교체를 넘어,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정치적 안정성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읽힌다. 전통 양당 체제가 흔들리고, 반이민·포퓰리즘 정서가 확산되며, 정부에 대한 신뢰가 빠르게 소진되는 현상은 비단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버넘 정부가 실제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지, 아니면 리폼 UK의 공세 속에 여덟 번째 총리 교체로 이어질지는 앞으로 몇 달간 영국 정치를 지켜보는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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